- 저자
- 이어령
- 출판
- 아르테(arte)
- 출판일
- 2015.09.10
군말
한용운
'님'만 님이 아니라 긔룬 것은 다 님이다. 중생(衆生)이 석가(釋迦)의 님이라면 철학(哲學)은 칸트의 님이다. 장미화(薔微花)의 님이 봄비라면 마시니의 님은 이태리(伊太利)다. 님은 내가 사랑할 뿐 아니라 나를 사랑하나니라.
연애(戀愛)가 자유(自由)라면 님도 自由일 것이다. 그러나 너희들은 이름 조은 自由에 알뜰한 구속(拘束)을 밧지 안너냐. 너에게도 님이 잇너냐. 잇다면 님이 아니라 너의 그림자니라.
나는 해 저문 벌판에서 도러가는 길을 일코 헤매는 어린 양(羊)이 긔루어서 이 시(詩)를 쓴다.
그런데 우리는 대체 뭐냐. 만해가 애써 찾아서 갈고 닦아낸 님이라는 그 귀중한 한국말, 열려 있는 말, 모든 계층과 그 영역을 횡단하는 말, 어느 대상에 가 붙든 그것을 끝없이 새롭게 변형시키고 심화시키는 말, 우리를 목마르게 하는 말, 침묵 속에서 노래를, 어둠 속에서 빛을 그리고 타다 남은 재를 다시 기름이 되게 하는 기적의 말, 그 입체적인 시의 말을 그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달려들어 망치로 두들겨 펴서 납작하게 만들어놓았는가. 자유롭고 아름다운 한국말의 그 님을 정치와 종교의 울 안에 가두어 가축처럼 길들이려 했는가.
『언어로 세운 집』, p.121
첫 번째 시로 등장한 '엄마야 누나야'를 읽을 때부터 그동안 속았구나 싶다.
무비판적으로 그냥 받아들인 건지도, 시험 점수를 올리기 위해 그냥 외운 건지도 모르겠지만...
교과서에 실릴 정도로 유명해 당연히 그 의미와 느낌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시들이...
그 시들이 아니다...
시어를 이렇게 좁게 해석하고 있었구나, 더 큰 그림, 광활하게 펼쳐지기도 편안하게 좁혀지기도 하는 시간을 보지 못했구나.
내가 도대체 뭘 읽고 뭘 배웠던 거지?
이어령 선생님께서 대중들에게(학생들에게?) 익숙했던 시의 해석을 비틀어가는 과정을 따라가다 보면 신비롭고 놀라운 더 큰 세상을 만나게 된다.
익숙한 시를 읽으며 낯설고 새로운 감각을 하나하나 깨치는 과정이 흥미진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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