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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생각하다

언어로 세운 집_내가 배웠던 그 시가 아니다!

by 나는 나인 나 2023. 1. 3.
언어로 세운 집
1996년 《조선일보》에서 연재되었던 연재물《다시 읽는 한국시》가 20년 만에 책으로 출간되었다. 『언어로 세운 집』은 저자 이어령 교수가 직접 선정한 한국의 대표적인 명시 32편을 독창적인 시각으로 해설한 책이다. 시대적 배경이나 시인의 전기적 배경에 치우쳐 시를 오독해온 우리에게 시어 하나하나의 깊은 의미를 일깨워주고, 문학 텍스트 속에 숨겨진 상징을 기호학으로 분석함으로써 일상의 평범한 언어에 감추어진 시의 아름다운 비밀을 파헤쳐 보여준다. 그저 시에 대한 주관적 감상평을 나열한 뻔한 해설서가 아닌, 30년간 문학을 가르쳐온 이어령 교수의 시 문학수업을 담아낸 이 책은《진달래꽃》, 《향수》, 《서시》, 《광야》 외에도 학창시절 국어 교과서에 실려 있었지만, 많은 시간이 흐른 뒤에도 머리가 아닌 가슴속에 각인되어있는 32편 명시들의 깊은 시 세계를 보여준다. 김소월의 《진달래꽃》이 이별을 노래한 시가 아니라 사랑의 기쁨과 열정을 노래한 시라는 사실, 한용운의 『님의 침묵』 속의 ‘님은 과연 누구일까?’ 등 언어 심층에 싸인 시의 비밀을 밝혀낸다.
저자
이어령
출판
아르테(arte)
출판일
2015.09.10

군말

한용운

'님'만 님이 아니라 긔룬 것은 다 님이다. 중생(衆生)이 석가(釋迦)의 님이라면 철학(哲學)은 칸트의 님이다. 장미화(薔微花)의 님이 봄비라면 마시니의 님은 이태리(伊太利)다. 님은 내가 사랑할 뿐 아니라 나를 사랑하나니라.
연애(戀愛)가 자유(自由)라면 님도 自由일 것이다. 그러나 너희들은 이름 조은 自由에 알뜰한 구속(拘束)을 밧지 안너냐. 너에게도 님이 잇너냐. 잇다면 님이 아니라 너의 그림자니라.
나는 해 저문 벌판에서 도러가는 길을 일코 헤매는 어린 양(羊)이 긔루어서 이 시(詩)를 쓴다.


그런데 우리는 대체 뭐냐. 만해가 애써 찾아서 갈고 닦아낸 님이라는 그 귀중한 한국말, 열려 있는 말, 모든 계층과 그 영역을 횡단하는 말, 어느 대상에 가 붙든 그것을 끝없이 새롭게 변형시키고 심화시키는 말, 우리를 목마르게 하는 말, 침묵 속에서 노래를, 어둠 속에서 빛을 그리고 타다 남은 재를 다시 기름이 되게 하는 기적의 말, 그 입체적인 시의 말을 그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달려들어 망치로 두들겨 펴서 납작하게 만들어놓았는가. 자유롭고 아름다운 한국말의 그 님을 정치와 종교의 울 안에 가두어 가축처럼 길들이려 했는가.

『언어로 세운 집』, p.121


첫 번째 시로 등장한 '엄마야 누나야'를 읽을 때부터 그동안 속았구나 싶다.
무비판적으로 그냥 받아들인 건지도, 시험 점수를 올리기 위해 그냥 외운 건지도 모르겠지만...
교과서에 실릴 정도로 유명해 당연히 그 의미와 느낌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시들이...
그 시들이 아니다...
시어를 이렇게 좁게 해석하고 있었구나, 더 큰 그림, 광활하게 펼쳐지기도 편안하게 좁혀지기도 하는 시간을 보지 못했구나.
내가 도대체 뭘 읽고 뭘 배웠던 거지?
이어령 선생님께서 대중들에게(학생들에게?) 익숙했던 시의 해석을 비틀어가는 과정을 따라가다 보면 신비롭고 놀라운 더 큰 세상을 만나게 된다.
익숙한 시를 읽으며 낯설고 새로운 감각을 하나하나 깨치는 과정이 흥미진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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